지난 11월 문화평론가 황현산 님의 트윗을 발견하고 많은 생각이 스쳤다.
지난 10년간 유럽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관련 업계에서 일하며 들었던 소회를 정리할까 한다.
황현산 님이 지칭한 '지금은 쓸모없음'은 현 한국 사회에서 예술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을 함축적으로 이야기하신 듯 하다. 약간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한국에 사는 일반 30대 이상 성인들 대부분에게 예술이란 것은 우리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직간접적으로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수만이 누리는, 이해하기 어렵고 흥미롭지 않은 무엇이다. 그 외 20대, 30대 이하들에게 예술이란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느낌 있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배경?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해주는 이가 관람객들의 '인생 사진'이 나올 수 있는 스팟을 가르쳐주는 게 현재 상황이니...
한국에서 디자인과 예술이 세대를 막론하여 대중화가 더디고 한국의 세계화는 외치지만 그 성과가 저조한 이유는 '내수'라 말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 자체적으로 우리의 예술과 디자인을 향유하는 방법과 그를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60년대부터 이어온 '나만 잘살아 보세'를 기반으로 한 기형적인 산업화 저변에 깔린 천박함Frivolity과 '50년 한강의 기적'이라 칭송하지만 우리가 그간 겪어온 문화와 인생 전반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진화할 시간을 허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리게 만든 비정상적 산업화 속도 때문일 것이다. 소위 '워라밸'을 중시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도 자기계발이라는 명목하에 쓸모있는 일에만 제시간과 능력을 바치는 것이 미덕이기에 앞서 말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란 묘한 것이라서, 쓸모없음의 상태에서 그 본디 힘과 가치가 드러난다.
...(중략)... 예술이 제 본디 힘과 가치를 가지는 조건은 ‘쓸모와의 거리’다.
인문학의 힘은
인간이 제 정신적 고양을 쓸모에만 바치거나 그런 태도에 함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예술과 인문학은 인간이 돈 되는 일보다는 돈 안 되는 일을 위해 살도록,
돈이 아닌 다른 소중한 가치에 좀 더 정신을 팔고 용감하게 좇도록 한다."
쓸모없는 예술 by 김규항
사실 패션은 기본적으로 의복의 기능적 쓸모가 있다. 또한, 세계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세계 많은 사람들의 실질 경제 살림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산업이기에 매우 '쓸모가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쓸모없음'에 몰두하여 인간의 가치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인문학자 사이에서 패션을 연구하는 것은 '천박하다'고 여기기에 사실 해외에서도 인문학적 패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른 인문학에 비교하면 매우 소수이다.
특히나 패션의 개념을 단순히 기능적인 역할의 의복Clothing, 내 소비와 부의 수준을 보여주는 럭셔리 브랜드, 셀럽들이 입고 미디어가 추천하는 유행 스타일, 트렌드에 국한되어 있는 한국에서는 어떨까...
2011년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 때 스티브 잡스가 창의성과 혁신의 기반이 인문학이라고 설파한 이후 쓸모있는 기술과 가격 차별로만 시장 경쟁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기업들은 철학, 인문학을 새로운 돌파구로 여긴 것 같다. 패션 쪽도 예외는 아니어서 디자인 인문학, 패션 인문학 등의 용어가 새로 나오고 그에 관련 멘토들이 등장하며 샤넬, 디올, 루이비통, 막스마라 등 인터네셔널 럭셔리 브랜드를 앞세워 패션 전시회를 여는 등 인문학과 패션을 연결짓는 시도가 다양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인문학을 빌려 스스로 메시지와 비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기업의 비즈니스적 마인드가 깔려있다. 한국의 '패션 전시'의 시작도 역시 인간의 가치, 디자인의 가치, 한국 패션 시스템, 인터네셔널 패션 사회에서의 한국의 패션 등 이런 고찰은 모두 배제한 채 하이패션 브랜드를 앞세워 자신들의 미래 이윤을 생각하여 만든 '쓸모있는' 거대 쇼케이스를 '쓸모없음'의 전시회란 이름을 차용하여 전개한 것...
물론 한국에서 '패션 전시'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해준 하이 패션 하우스들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수년간 디자인철학을 가지고 디자인한 아름답고 멋진 전시 세팅과 전시품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즐겁게 지낸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할 수 있으나 최소한의 인문학적 비판 정신은 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Tilda Swinton by Sølve Sundsbø for Vogue Korea, July 2017
실제 패션은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의 교차점에 있다.
패션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쓸모가 있다'.
또한 패션 자체는 서브 컬쳐가 되거나 놀이가 되거나 아니면 인간의 인체에 펼쳐지는 하나의 예술이라는 의미로 확장 인식되고 있어 디자인의 철학, 디자인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그것이 소비되는 과정의 사유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되새기는 인문학적 '쓸모없음'의 성격을 포함한다.
미학 평론가 진중권은 '예술계가 모든 이를 위해 공정한 판단을 내려주는 중립적 사회가 아니고 그 역시 이론과 이념에 오염되고, 시장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특수한 사회'라고 비판한다. 한국 패션계도 역시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패션위크를 치르며 자본주의적 '쓸모있음'만을 강조해 오지 않았는지... 또한 소비자인 우리들도 최신 유행 트렌드, 스타일링 팁, 신상 쇼핑 팁 같은 제목이 난무하는 자본주의적 컨텐츠만을 접해왔기에 그 범주에만 한정하여 비슷한 컨텐츠들을 재생산한다.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인간에 내재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표현하고 우리를 자극하는 '쓸모없는 패션'을 보고 싶다. 그 '쓸모없음'을 찾아내고 기뻐하며 찬미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기꺼움을 보이는 우리를 보고 싶다. 그게 바로 될 때 한국의 패션 문화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며 세계에서 한국 패션이 우뚝 서는 그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공부, 또 공부해야겠다. 라고 다짐한다.